홍경자심리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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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다시 피어나기(Blooming Again)의 내용과 지난 참여자 후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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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경자심리상담센터
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6-09-28 15:30

안녕하세요????

「내 인생 다시 피어나기(Blooming Again)」를 소개하는 여섯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론과 함께, 참여자가 직접 작성한 자서전을 소개합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우리나라도 선진국 수준으로 인권이 신장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심리적으로는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힘들어 하는 경향이 있다. 또 이와 반대로 상대방을 자기의 뜻대로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인류의 지성은 진화하여 세상은 점점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와 병행하여 우리도 다음과 같은 영역에서 함께 노력하여 우리 각자의 자존감을 지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권리인 편안하고 행복할 권리를 향유하면서 살아가야 하겠다.

따라서 제아무리 어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아무리 사회적 지위나 학력이 낮더라도 인격적으로는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실수하기 마련이므로 제아무리 실수하고 미숙한 행동을 하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는 한도내에서의 실수와 과오는 용납되고 수용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것을 가지고 과도하게 처벌하고 지탄하는 것은 삼가야 하겠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녀에게 다음과 같은 인권의식을 고취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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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인간적인 권리

* 나는 인격적으로 존중되고 이해받을 권리가 있다

* 나에게는 나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 나의 사생활을 침범당할 때-시간 장소 재산 업무등, 나의 것을 지킬 권리가 있다

* 나는 실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 나는 휴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 내 의견을 바꿀 수 있는 권리가 있다

* 상대방의 무리한 요구는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만의 개성과 생활방식대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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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프로그램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 프로그램에 참여한 분의 이야기를 만나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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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난 학기 참여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작성한

‘나만의 자서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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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의 동의를 받아 익명으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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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꽃밭을 떠나지 못하는가 - K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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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꽃밭에 물을 준다. 화초를 가꾸고 고추 도마도를 따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아이구 허리야" 이렇게 힘들어 하면서도 다음날이면 또다시 꽃밭으로 나간다.

중학교시절 나는 냉방에서 자취를 하며 어두운 밤길에 신문을 돌렸다. 객지에서 삶을 스스로 개척하며 고아같은 심정으로 살아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새로 근로장학생제도를 개설하였기에 나는 식당에서 일하였다. 아침 일찍 가사실습실에 가서 불을 지피고, 멸치육수를 끓이고, 쉬는 시간마다 달려가 다시 국물을 젓고, 점심시간에는 내가 만든 냄비국수와 단팥죽을 학생들에게 팔았다. 방과후에는 시장에 가서 다음날의 식재료를 사왔다. 그리고 나면 몸은 지쳐 떨어져서 나는 대학 입시준비를 해본 적이 없다. 물론 대학교 때에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틈틈이 학교의 화단과 온실을 기웃거렸고, 철마다 산과 들로 나가 푸른 하늘을 향하여 숨을 내뿜었다. 들꽃과 시원한 공기가 나를 기쁘게 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일까 나는 평생 일하고 공부하며 부지런히 살았다. 한창 나이에 냉방에서 살았던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나는 일생동안 아팠다. 그런데도 나늘 늘 과로속에 나를 밀어 넣었다.

행복한 결혼의 신기루는 신혼 후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성공한 한국남자로서의 특권을 만끽하면서 가정을 지킨다는 개념이 애초부터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총각시절에 5년간을 목숨을 내걸다시피 줄곧 나에게 찾아왔으므로, 결혼초부터 나를 그렇게 팽개친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결혼한지 2개월만에 전화 한통화도 없이 불쑥 시어머니는 장남집을 떠나 셋째 아들 집으로 오셨다. 딱 두번 뵈온 후에 결혼식을 올렸던 터라 나는 시모님이 어렵기만 했다. 그런 시모님은 손님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혼방의 우리 부부와 같이 주무셨다. 그렇게 5년 이상을 시모님은 우리방에서 남편과 함께 주무시면서 행복을 구가하였다. 나는 자연히 손님방으로 가서 잤다.

우리집에 오신 다음날부터 신혼의 안방을 차지하고 나를 노려보며 호통치는 시어머님 앞에서 나는 자동적으로 죄인이 되어 안방마님의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생동안을 겁에 질려 주변인으로 맴돌았다 "이게 다 내살림이다. 니 것이 어디 있느냐?" "네 어머님, 이게 다 어머님 것입니다. 어머님 마음대로 하세요" 어머님은 우리집에 사시는 25년동안 1년에 8-9개월은 우리집을 본부로 삼고 나머지 3~4개월은 다른 자녀들의 집과 고향 친지들 집에 다니시면서 아주 행복한 노년을 보내셨다. 그분은 그런 분으로 알고 나는 잘해드렸다. 소위 사회의 지도자격인 남편이 모순투성이인 자기 어머니에게 단한번도 이의를 달지 않았기에 나는 절망하였다. 어머님에게 순종적인 남편은 의심많은 시어머님의 사주를 받았는지 예전에는 월급봉투를 나에게 건네주었는데 어느날부터인지 월급 봉투를 나에게 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60년을 살면서 지금까지 남편은 자기의 수입이 얼마인지 자기의 재산을 어디에 투자하는지 나에게 말한 적이 없다.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궁금해하는 가운데 세월은 흘러가고, 아이들은 생겨나고, 어느덧 하늘이 낳은 효자인 남편과 시모는 두마리의 호랑이가 되어 나를 물어뜯기 시작하였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런 학대를 받아야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된다. 남편의 만성적인 학대, 외도, 이중생활 속에서 유일한 생명줄처럼 공부와 연구의 끈을 붙잡고 자신을 혹사시키면서 삶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나는 신음하였다. 현대 여성으로서 공부를 할만큼 했다는 내가, 조선시대의 여인으로 살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지금 그런 처지였다면 60년전과는 달리 처신했을 것이다. 세 아이의 장래, 친정 부모의 피맺힌 눈물, 나의 평판이 족쇠가 되어 나의 건강과 맞바꾸는 오랜 세월동안 나는 갈등하고 헐떡거렸다. 심리적으론 진즉부터 이혼상태인데 왜 나는 끝내 지옥같은 가정을 팽개치지 못했던가?

제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아랫사람이라 하더도 우리는 자기의 자리를 굳게 지켜내야 한다. 제아무리 자기에게 과오와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인간적인 권리와 존엄성은 지켜야 한다. 그시절의 나는 그걸 하지 못했다. 게다가 나에게는 나의 조모, 외조모의 한맺힌 DNA가 들어있다. 그들의 가치관이 내속에서 나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중년에 15년 동안을 면도칼로 베는듯한 통증과 구토의 췌장염을 앓았다.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먹지도 못하고 토하면서 길을 걸어가다가도 수차례 쓰러졌다. 그뒤로도 10여년동안 만성 췌장염의 후유증으로 허덕였다. 소화장애와 등과 가슴의 통증은 나에게 친숙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죽음이 참된 안식이요 평화라는 것을 내 몸으로 내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힘에 겨웁게 두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씨름하면서 산다. 하나를 버리자니 아깝고, 둘을 들고 있자니 심신이 녹아난다. 둘 다 아주 소중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는 언젠가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인생이라는 학교를 미련없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미리서 미리서 조금씩 덜어내고 과감하게 정리하는 습관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드디어 나는 분노나 증오의 마음도 섭섭함도 진즉 떠나보내고 그저 담담한 심정으로 아이들의 아빠와 졸혼상태로 지낸지 20년이 넘는다. 따지고 보면 나의 과오와 어리석음도 우리들의 불행에 한 몫 기여했다는 것을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공중으로 날아가 마음의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 본다. 우리는 연극을 아주 열심히 심각하게 연출하고 연기하고 있는 것 같다. 각자의 위치에 서서 비극을 연출하고 연기하면서 공동작품을 만든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감상하면서 또한번 울고 웃고 사는 것이 아닐까?

남편은 한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었다. 6.25 동란때 살던 집은 불타고 형과 누나를 잃었고, 시체도 찾지 못하였다. 그뒤에 연좌제라는 사악한 제도 때문에 형제들의 진로는 계속해서 막혔다. 그속에서 지체높고 아름다운 어머니는 5남매를 치마폭으로 감싸 길러주신 여신이었다. 그러한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무조건 옳았다. 엄마와 아들은 융합되어 하나다. 그래서 사실상 나는 애써 어머님을 받들고 힘겹게 사는데, 엄마가 살그머니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되면 그는 도깨비눈을 하고, 아내를 원수요 적으로 취급하였다. 이성적인 논리나 아량, 이해는 전혀 없었고 나는 범죄자요 저능아로 취급받았다. 내가 단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못하게 무조건 입을 막아버리고 비정하게 내리치는데, 그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는가? 이제 그도 나이 지긋하여 천국 소망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자기가 인생 단막극을 너무 심각하게 연출 연기했다는 것을 조금은 깨닫고 있지 않을까?

치매 증상을 수년째 보이고 있는 애들 아빠와 나는 1주일에 한두번씩 만나 식사를 한다. 사람들이 치매를 앓게 되면 이쁜 치매와 고약한 치매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이는 이쁜 치매를 보인다. 도깨비 눈은 사라지고 천사의 눈이 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과 나에게 감사하다고 전화한다. 자기가 성공하고 잘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로지 내 덕분이라고 착각의 말까지 한다. 그래서 세상은 요지경!

한편 내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 왔기에 넉넉하게 품는 마음과 세상경륜의 안목도 부족하였다. 나의 작은 그릇을 깨트리기 위하여 시련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에 의하여 한때 죽는다고 소문이 났던 내가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나는 오늘도 꽃나무들과 대화를 나눈다. "이쁜 내새끼들 내가 얼마나 더 오랫동안 너희들의 방긋 방긋 웃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무튼 우리가 빠이빠이할 때 나는 너희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너무 너무 즐거웠고 행복했다고 추억할꺼야.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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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지금의 나를 이해하고 앞으로의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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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다시 피어나기(Blooming Again)」와 함께

나의 이야기를 천천히 돌아보고, 새로운 시선으로 나의 삶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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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이야기를 나누어 주신 참여자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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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그램 신청을 원하시면 아래 사진을 클릭하여 정보를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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